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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Sacrum, 神聖로마帝國)은 중세에서 근대 초까지 이어진 중부유럽 나라들의 정치 연방체이다. 프랑크 왕국베르됭 조약(843년)으로 나뉜 동쪽에서 독일 왕이 마자르족을 격퇴한 후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수여받아 신성 로마 제국 건국을 선포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초기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으나, 점차 이탈리아에 대한 간섭으로 독일 지역에 소홀히 하면서 여러 제후들에 의해 분할 상태였다. 30년 전쟁(1618~48년)이 일어난 나라로 유명하며, 30년 전쟁에 패배하여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으로 많은 영토를 잃었다. 나중에는 프랑스의 공격을 받아 제국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프란츠 2세가 결국 제국 해체를 선언하였다. 그 후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워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왕가였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18세기에는 지금의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슬로베니아,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해서 네덜란드의 대부분과 폴란드의 일부에 해당하는 영토를 유지했다. 한때는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전역, 프랑스, 이탈리아의 일부까지도 포함했었다. 844년(또는 1006년[1])간 지속된 장수 국가로 유명하다.

명칭[]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여, 11세기 무렵에는 "로마 제국(Römisches Reich)", 12세기 무렵에는 "신성 제국(Heiliges Reich)", 13세기 이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이라고 칭하였다. 16세기에는 "도이치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독일어: Reich"는 "라틴어: imperium"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제국"을 의미한다. "신성"(神聖)이라는 형용사는 1157년프리드리히 1세가 제후들에게 발포한 소환장에서 처음 나타난다. 본래 고대 로마 제국이나 카롤루스프랑크 왕국의 후계자를 자처하였으므로, 이 정치체제의 군주는 정식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프랑크 국왕, 후에는 로마 국왕이며, 이 직함을 얻은 사람이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로마 황제로 취임했던 것이다.

  • 독일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하일리게스 뢰미셰스 라이히[*] 듣기 (도움말·정보),
  • 라틴어: Sacrum Romanum Imperium 사크룸 로마눔 임페리움[*]
  • 이탈리아어: Sacro Romano Impero 사크로 로마노 임페로[*]
  • 네덜란드어: Heilige Roomse Rijk 헤일리허 롬서 레이크[*]
  • 체코어: Svatá říše Římská 스바타 르지셰 르짐스카[*]
  • 프랑스어: Saint-Empire romain 생탕피르 로맹[*]
  • 슬로베니아어: Sveto rimsko cesarstvo 스베토 림스코 체사르스트보
  • 폴란드어: Święte Cesarstwo Rzymskie Narodu Niemieckiego 시비엥테 체사르스트보 짐스키에 나로두 니에미에츠키에고[*]
  • 영어: Holy Roman Empire 홀리 로먼 엠파이어[*]

카롤링거 왕조 포함 여부[]

800년 12월 25일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 1세가 로마에서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축성된 뒤 카롤로 아우구스토 로 선포된 이후를 시발점으로 삼는다. 이후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암살 이후 제관 수여는 일시 중단되었으며 962년 독일오토 1세로마 교황 아가페투스 2세로부터 제관을 수여받았다.

학자에 따라서는 베렝가리오 1세의 사후 이탈리아의 군주들을 명목상의 신성 로마 황제로 간주하기도 하고, 일각에서는 것을 962년 독일오토 1세로마 교황 아가페투스 2세로부터 제관을 받은 것을 시점으로 본다.

실질적 권위[]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며 제국의 정식 명칭인 '신성 로마 제국'은 권위를 잃었다. 제국은 18세기까지도 '신성'이라는 수식어는 유지하려 노력하였으나, '로마'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고, '독일 제국'으로 불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2]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에 있지도 않으며, '제국'도 아닌 어떤 것이다. (프랑스어: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2]

1806년 8월 1일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제국 해산을 결정할 때 나폴레옹 1세의 명을 받은 프랑스 공사는 이 제국을 그저 '독일 제국'이라고만 불렀다. 같은 달 6일 발표된 황제의 제국 해산 칙서에서도 '신성 로마'라는 말은 없었으며, 이 사실을 적은 한 신문기사는 '독일 제국 해산!'이라고 머릿기사를 땄다.[3] 이를 본 대문호 괴테는 일기에서 "신문 기사를 보았다. 독일 제국이 해산되었다."라고 적었다.[4]

금인칙서를 발표한 카를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를 황제 공식 문서에 가장 많이 사용한 황제이다.[5] 그런데 카를 4세의 치세 무렵 공문서는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로도 작성되고 있었다. 카를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대개 독일어로 된 문서에서였고, 라틴어로 된 문서에서는 '로마'를 빼서 '신성제국'이라고만 하였다.[5]

역사[]

카롤링거 왕조[]

이 부분의 본문은 카롤링거 왕조입니다.신성 로마 제국 사람들은 800년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황제"에 등극한 것을 서로마 제국의 제위가 프랑크인들에게 넘어온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 역사가들은 카롤루스 대제를 제국의 시조로 생각하였다. 이 관점은 1806년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카롤링거 제국은 베르됭 조약으로 3개의 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었고, 이후 924년까지 교황의 승인을 받아 대관식을 거행한 황제는 실질적 이탈리아 반도만을 통치하였다.

중세 전기[]

독일 왕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제국의 형성====

[1][2]서기 1000년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900년경부터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여러 공작령(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작센, 로타링기아)들이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유아왕 루트비히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이들은 카롤링거 왕조의 지배를 거부하고 공작들 가운데 한명인 프랑켄의 콘라트를 동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선출하였다. 콘라트는 죽기 직전 왕위를 그의 라이벌인 작센 공 하인리히에게 넘겼고, 936년 하인리히가 죽자 그의 아들 오토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1세는 수 차례에 걸친 제후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공작의 임명권을 다시 가져와 왕권을 강화하였다.

951년 오토 1세는 미망인이 된 이탈리아 왕국의 아델라이데 1세를 구원하고, 그녀와 결혼하여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952년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독일과 이탈리아 반도, 그리고 로마 교황청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된다.

서임권 투쟁[]

이 부분의 본문은 서임권 투쟁입니다.독일 왕들은 가톨릭 주교들을 종종 관리로 고용하였고, 독일 내 교구의 주교가 될 사람을 직접 결정하기도 하였다. 세속의 군주가 교회의 사제를 임명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하인리히 4세서임권 투쟁을 벌이게 된다. 교황의 주교 서임권을 인정하지 않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세례명 "그레고리오"가 아닌 속명 "힐데브란트"(Hildebrand)로 칭하면서 교황에게 했던 충성 서약을 취소하고, 자신의 주교들에게 교황을 파문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에게 대항한 하인리히 4세는 정치적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한편 독일 공작들은 파문당한 하인리히에 대한 지지를 취소하고 슈바벤 공 루돌프를 독일 왕으로 선출했다. 하인리히는 루돌프 공작을 물리쳤으나, 또다시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고 공작들의 반란은 물론 자신의 아들들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의 둘째아들 하인리히 5세교황 칼리스토 2세와 화해하고, 보름스 협약을 맺었다. 협약의 결과로 황제는 주교 서임권을 포기하고 대신 교회령 내에서의 정치적 권리는 유지할 수 있었다.

호엔슈타우펜 왕가[]

[3][4]성창을 쥐고 있는 주교 아데마르하인리히 5세가 1125년에 죽었다. 공작들은 하인리히의 아들 대신 이미 나이가 많은 작센 공 로타르 3세를 선출하여 황제권의 약화를 노렸다. 1138년 로타르 3세가 죽자 공작들은 또다시 로타르 3세의 후계자이자 사위인 바이에른 공 하인리히 10세 대신 하인리히 5세의 가까운 친척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콘라트 3세를 선출하였다.

콘라트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프리드리히 1세는 해방노예들인 ministerialia에게 땅을 빌려주고 그 댓가로 이들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이들은 후에 중세 기사 계급의 형성 및 황제권의 강화에 기여하게 된다. 또한 황제와 공작들은 이 때부터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프라이부르크뮌헨이 이때 건설되었다.

호엔슈타우펜 왕가 시대에 독일 서쪽의 농부와 상인, 장인들은 이전까지 슬라브족 농부들이 드문드문 살고 있던 동쪽 영토에 평화적으로 진출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또한 독일 귀족과 슬라브 귀족들 간의 결혼 등으로 포메른(포모제)과 슐레지엔(실롱스크)이 점차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후계자 하인리히 6세 시대에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황금기를 맞았다. 하인리히 6세는 콘스탄체와 결혼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얻고, 세습 왕조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197년 하인리히 6세가 죽었을 때, 시칠리아에서 살고 있던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미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황제로 즉위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공작들은 하인리히의 막내동생인 슈바벤의 필립과, 바이에른 및 작센 공작의 아들 오토 4세를 공동 황제로 선출하였다. 1208년 필립이 개인적 결투에서 죽고 오토가 유일한 황제가 되었으나, 오토가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까지 주장하게 되자 정치적 위협을 느낀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시칠리아의 왕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 두 왕국을 병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아들 하인리히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앉힌 후, 독일로 진군하여 오토를 물리치고 독일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약속을 어기고 여전히 시칠리아에서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였고, 교황과 약속한 십자군 또한 차일피일 미루어 교황에게 파문당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행정 및 통치 면에서 능력을 보였으나, 그의 치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중앙 집권화가 약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보다 현대화되고 중앙집권화된 시칠리아 왕국의 통치에 집중하는 동안 독일은 거의 비워 둔 채로 공작과 주교들에게 독일 통치를 위임하였다.

공위 시대[]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독일은 콘라트 4세와 홀란트의 빌렘 2세를 지지하는 귀족들로 각각 갈라지게 되었다. 1254년 콘라트 4세가 죽고 나서는 1273년 합스부르크 왕가루돌프 1세가 선출될 때까지 왕이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정치구조의 변화[]

한자 동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중세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13세기에는 귀족들이 다스리는 봉건 제도가 약화되고 부르주아지들의 권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영지를 하사받은 귀족이 땅을 다스리던 기존의 봉건 제도에서 점차 땅을 소유한 사람이 사법권을 행하는 형태의 근대적 정치구조로 변경되었으며, 농민들은 세금을 낼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통치권에 아직 입법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15세기에 들어서야 입법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중세 후기[]

호엔슈타우펜 왕조 이후[]

[5][6]1273년-1378년 사이 신성 로마 제국의 왕가들13세기 이전까지, 황제의 재력과 권력은 "황제 직할령"으로 번역할 수 있는 Reichsgut 에서 나왔다. 황제 직할령은 항상 당대의 황제 소유였으며, 자유 제국 도시들도 황제 직할령에 속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직할령은 점차 황제의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각 지역의 제후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일부 직할령들은 1806년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남아 있었으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는 직할령들은 점차 왕의 직접적인 관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대신,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루돌프 1세를 시작으로, 독일 왕들은 자기 출신 가문의 영지로부터 재력과 권력을 확보하였다. 가문 영지는 직할령에 비해 흩어져 있지도 않았고, 따라서 관리가 쉬웠다. 1282년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와 스티리아 공국을 아들들에게 나눠 주었다.

정치 구조의 변혁[]

[7][8]1560년 당시 지역 통치 기구인 크라이스의 모습카를 4세가 발표한 금인칙서 (1356년)로, 왕을 선출하는 선제후 및 왕을 선출하는 과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15세기까지 제국의 "헌법"은 불명확한 상태였으며, 선제후들 및 다른 제후들이 제국 운영에 어떻게 참가할 것인가는 당대의 왕이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특히 룩셈부르크 왕가의 지기스문트(1410년 독일왕 선출, 1433-37년 황제 재위)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리드리히 3세(1440년 독일왕 선출, 1452-93년 황제 재위)가 황제 직할령을 무시하고 왕가의 땅에서 거의 나오지 않음에 따라 이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제후들은 서로 분쟁하는 일이 잦았고 이 분쟁은 종종 내전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교회 또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세 명의 대립 교황 간 분쟁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해소되었으나, 직후 후스파를 진압하는데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을 하나의 교황 아래 일치시키려 하는 중세적 사고방식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라틴어 re-formare는 이때부터 개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1486년 헝가리와의 전쟁에 전비를 제공하고, 또한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를 독일왕으로 선출할 것을 제후들에게 요구했다. 요구를 받은 제후들은 제국 궁정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한목소리로 요구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는 의회 소집을 거부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보다 유화적인 성향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가 1495년 처음으로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때부터 선제후들 및 다른 제후들이 참여하는 제국 의회(독일어: Reichstag)가 확립되었다. 첫 번째 제국 의회에서 지역 통치 기구인 크라이스(Reichskreis)와 대법원에 해당하는 제국 법원의 설립이 결의되었다.

르네상스[]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종교 개혁 문서를 보십시오. 카를 5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9][10]1520년 지도제작자 발트제뮐러가 황제 카를 5세에게 바친 유럽 지도1516년 카를 5세의 외조부인 아라곤페르난도 2세가 죽었다. 모성 상속을 허용하는 아라곤의 왕위계승 규칙과 어머니 후아나 1세의 정신질환, 그리고 조부 막시밀리안 1세의 압력으로 카를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를 "카를로스 1세"로서 상속하게 되었다. 이로써 포르투갈을 제외한 모든 이베리아 반도가 한명의 군주 아래 통일 스페인으로 합쳐졌다. 1519년 카를로스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스페인과 독일은 잠시 합쳐졌으나, 카를 5세가 이와 같이 각 왕위를 따로 상속받음으로써, 두 왕국의 통합 또한 군주 개인의 일시적 통합의 성격을 띄었다. 카를 5세가 죽은 후 신성 로마 제국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스페인은 아들 펠리페 2세가 각각 상속하게 된다.

카를 5세의 치세에는 종교 분쟁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카를 5세가 제위에 오르기 전인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많은 제후들은 이것을 카를 5세의 권위에 대항할 기회로 보고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북부와 동부의 제후들, 그리고 슈트라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등의 자유도시들이 개신교로 개종한 가운데, 서부와 남부의 제후들은 여전히 로마 가톨릭교회로 남아, 제국은 종교를 기준으로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바로크 시대[]

바로크, 개신교 제후동맹, 가톨릭 제후연맹, 30년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카를 5세는 치세의 대부분을 프랑스 및 개신교 제후들과 전쟁을 치르며 보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으로 프랑스를 포위하기 위해 아들 펠리페 2세를 잉글랜드의 여왕 메리 1세와 결혼시켰으나, 부부 사이에 자식이 없자 그런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555년 친프랑스파인 교황 바오로 4세가 즉위하자 카를은 가톨릭 제국 건설의 꿈을 포기하고 아들과 동생에게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을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은 개신교 제후들을 용인하게 된다.

이후 60년간 독일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동쪽 국경에는 오스만 제국이 점차 큰 위협으로 자라났으나,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려면 동쪽의 개신교 제후들에게 협조를 얻어야 했으므로 황제들은 동쪽에서의 분쟁을 피했다. 서쪽의 라인란트는 점차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이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네덜란드가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제국은 중립을 취했다.

1576년에 즉위한 루돌프 2세는 가톨릭 신앙보다 고전 그리스 철학에 심취하여, 정치에 관심을 끊고 보헤미아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자 가톨릭 교회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지역 장악을 시도했고, 개신교 제후들은 이에 불만을 안게 되었다. 루돌프 2세가 사망한 1612년 무렵에는 황제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 직후 보헤미아가 제국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이 전쟁으로 발전하여, 30년 전쟁(1618년-1648년)이 촉발되었다. 프랑스와 스웨덴 또한 이 전쟁에 개입하여 제국의 영토를 일부 획득하고 황제권을 약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이때 입은 타격을 마지막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11][12]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전쟁의 실질적 종료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료된 후, 사실상 독립국이었던 스위스 연방은 완전히 독립하였고, 네덜란드 또한 독립하였다. 각 제후국들 또한 거의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다. 이때부터 신성 로마 제국은 정치적 힘을 잃고 이름뿐인 제국으로 전락했다. 합스부르크 황제들은 무의미해진 제국을 경영하는 것보다 오스트리아 및 자신의 다른 영지들을 다스리는데 주력했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수도인 이 포위되었다. 2달간의 공방전 끝에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제국군이 오스만 투르크군을 물리치고 빈을 구원하였다. (빈 전투) 이로부터 오스만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근대[]

[13][14]1789년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 (갈색)과 프로이센 왕국 (푸른색)이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작은 나라들(일부는 너무 작아서 지도에 표시되지 않음)이 나머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왕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루이 14세가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성장시키고 있을 때, 독일에서는 프로이센 왕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경쟁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 18세기의 대부분을 전쟁을 치르며 보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및 제국의 해체[]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나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나라들이 여기에 휘말렸다. 한편 이 무렵 독일에서는 300개가 넘는 작은 제후국들이 서로 합병하는 한편, 교회 소유의 땅을 국가 소유의 땅으로 재분배하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한다. 나폴레옹의 압력으로 1806년 8월 6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가 퇴위하여, 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나폴레옹은 제국을 해체하여 프랑스의 괴뢰국인 라인 동맹으로 재편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살아남아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및 헝가리 왕국의 왕으로 남게 된다.

나폴레옹이 설치한 라인 동맹은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해체되고 독일 연방으로 대체된다. 이후 프로이센의 주도로 건설된 북독일 연방이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 제국이 건설되었고, 현대 독일의 모체가 되었다.

영토[]

신성 로마 제국의 강역은 현재의 프랑스 남동부에서 이탈리아 북부 일대까지 미치고 있었다. 제국은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의 3국으로 크게 나눌 수 있었다. 이것은 카롤링거 왕조 시절 프랑크 국왕의 정식 칭호가 "프랑크인, 롬바르트인, 로마인의 보호자"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각각 다른 장소에서 대관식을 치르며, 마지막으로 교황에 의해 로마 황제로 즉위하고, 제국 전체에 군림하였다. 다만 이 제국이 그 이름과 같이 실질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호엔슈타우펜 왕조까지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오스만제국의 빈 공방전 이후 영토 일부를 얻었으나, 30년 전쟁 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많은 영토를 프랑스, 스웨덴에게 할양해 주어 프랑스, 스웨덴이 강성한 국가가 되었다. 제국 내에서는 전통적으로 제후들의 권한이 강했으며, 나중에 이 제후들이 제국을 탈퇴함으로써 황제가 해체를 선언해 신성로마제국은 라인 동맹,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나뉘었다. 이때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건국해 신성로마제국의 명예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오스트리아가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합스부르크가 왕가는 완전히 소멸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황제로서 즉위하기 전에는 로마 국왕으로 불렸다. 교황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지 않았을 경우, 독일 왕으로 불렸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이 부분의 본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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