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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고전 아르메니아어: Կիլիկիոյ Հայոց Թագաւորութիւն Kilikio Hayots Tagavorutyun; 프랑스어: Le Royaume Arménien de Cilicie)은 중세 중기 셀주크의 침공에서 도피한 아르메니아계 유민들이 세운 독립 공국이다.[1] 이 나라는 아르메니아 고원 밖에 위치했고 고전기 아르메니아 왕국과도 구분되는데, 오늘날의 터키 남부인 알렉산드레타만 북서쪽의 킬리키아가 중심지였다.

이 왕국의 기원은 1080년 경 루벤조가 세운 공국인데, 그들은 여러 번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왕권을 차지한 적이 있는 바그라트조의 방계를 자칭하는 가문이었다. 수도는 본래 타르소스였으나 나중에는 시스로 옮겨갔다. 킬리키아는 유럽 십자군들에게는 강력한 동맹이었으며 스스로를 동쪽 기독교 세계의 보루로 여겼다. 아르메니아 본토를 외국에 빼앗긴 동안, 이 왕국은 아르메니아 공동체의식과 고유 문화의 중심점 역할을 했다.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국가개념에서 킬리키아 왕국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총주교의 좌가 킬리키아로 이전된 것에서 증명된다. 1198년 루벤조의 레본 1세가 대관식을 치르고 킬리키아는 왕국이 되었다.[2][3] 1126년에는 자벨 여왕이 헤툼 1세와 재혼하면서 헤툼조로 왕권이 계승되었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자 헤툼과 그의 후계자들은 아르메니아-몽골 동맹을 결성해 그들의 공적인 무슬림들, 특히 맘루크에 대항하고자 했다.[4] 13~14세기에 십자군 국가들이 해체되고 몽골이 이슬람화되자, 이 왕국은 현지 동맹 없이 고립되었다. 14세기 이집트 맘루크의 끈질긴 공격 끝에, 종교 문제로 분열되어 있던 뤼지냥조의 킬리키아 왕국은 1375년 멸망하고 말았다.[5]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 사회는 유럽인들과 상업, 군사적으로 교류하며 서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귀족들은 기사도, 의상 양식, 프랑스식 칭호와 이름, 언어 등 서유럽적인 요소를 받아들였고, 킬리키아의 사회구조 역시 전통적인 형태에서 서부의 봉건제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했다. 유럽 십자군 역시 아르메니아식 축성술이나 교회건축 등의 방식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야스항이 서방과 교역하는 동방의 중심지로서 기능했기에 왕국은 경제적으로도 번성했다.[6]


아르메니아인들의 초기 이민[]

티그라네스 대왕 치하의 킬리키아[]

킬리키아에 아르메니아가 들어온 것은 기원전 1세기 티그라네스 대왕 치하의 아르메니아 왕국이 확장하면서 레반트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83년, 심각한 내전으로 허약해진 셀레우코스조 시리아의 그리스 귀족들이 이 야심만만한 아르메니아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자 티그라네스는 페니키아와 킬리키아를 정복해 셀레우코스조 제국을 실질적으로 멸망시켰다. 티그라네스의 왕국은 남으로는 프톨레마이스(현재의 아크레)까지 닿았다. 정복당한 도시의 주민들 중 많은 수가 새로 건설된 대도시 티그라나케르트(티그라노케르타)로 보내졌다. 전성기에 달한 티그라네스의 아르메니아 제국은 폰토스 산맥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카스피해에서 지중해까지 확장했다. 티그라네스는 남쪽으로 현재의 이란 서부에 위치한 파르티아의 수도 엑타바나까지 침공했다. 기원전 27년, 로마 제국은 킬리키아를 정복해 로마의 동방 속주들 중 하나로 만들었다.[7]

동로마 제국 시대의 아르메니아계의 대량 유입[]

기원후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킬리키아는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하는 동방 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6세기에 아르메니아계들은 동로마 영토에 정착했다. 그중 많은 수가 로마 제국군에 병사나 장군으로 복무했고, 제국에서 중요한 위치로 승진했다.[8] 킬리키아는 7세기 아랍인들의 침공 때 점령되었고 전체가 정통칼리파왕조에 복속되었다.(하지만 965년에 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가 킬리키아를 재정복했기 때문에 정통칼리파왕조는 아나톨리아에 영구적인 교두보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칼리파조가 킬리키아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자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피난처와 보호를 찾아 서쪽의 비잔티움 제국령으로 도피해 지역 인구의 민족 구성이 불균형해지는 사태를 낳았다.[9] 킬리키아를 탈환한 뒤 비잔티움 제국은 동방 영토를 더 효과적으로 지키기 위해 제국 국경에 거주하는 고유 주민들을 이민시키고 재배치하는 정책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니키포로스는 킬리키아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을 추방하고, 시리아와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도들이 이민해 오도록 장려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976~1025)는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의 바스푸라칸까지, 남쪽으로는 아랍인들이 점령한 시리아까지 확장하려고 시도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 원정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카파도키아 각지로 동쪽으로는 킬리키아에서 남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고산지대까지 퍼져 나갔다.[10]

1045년 대아르메니아가 동로마 제국에 형식적으로 합병된 것과 19년 후 셀주크 투르크가 아르메니아를 점령한 사건은 킬리키아로의 아르메니아계 이민에 두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아르메니아 본토는 셀주크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바그라트조의 멸망 이후로 아르메니아인들은 독립국가를 재건할 수 없었다. 1045년의 합병 이후, 그리고 동부 제국령의 인구를 재배치하려는 동로마의 노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킬리키아로의 아르메니아계 이민은 증가했고, 중요한 사회-정치적 움직임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제국의 장교나 총독으로 일했고 로마제국 동방 변경의 중요한 도시를 다스리게 되었다. 셀주크 역시 상당한 역할을 했다. 1064년 알프 아르슬란이 지휘하는 셀주크 투르크군이 로마령 아르메니아의 아니(Ani)를 점령하며 아나톨리아로 진군해 왔다. 7년 후, 그들은 반 호수 북쪽 만지케르트에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를 패배시키며 비잔티움 제국에 결정적 승리를 얻어냈다. 알프 아르슬란의 후계자인 말리크-샤 1세도 셀주크 제국을 더욱 확장시키며 아르메니아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총대주교 그레고리 2세(Gregory II the Martyrophile)를 보좌하며 대변하던 킬리키아의 파르세그(Parsegh of Cilicia)의 탄원으로 부분적으로 세금을 경감받을 수 있었지만, 이어지는 총독들의 치하에서 징세는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인들은 동로마령과 킬리키아로 피난하게 되었다. 많은 아르메니아 귀족들이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제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지만, 일부는 독립적인 군주로 자처했다. 이런 초기 아르메니아 군벌들 중 가장 성공적인 예가 필라레토스 브라카미오스(Philaretos Brachamios)였는데, 이전에는 동로마의 장군으로 만지케르트에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 황제 곁에서 싸웠던 인물이었다. 1078년부터 1085년 사이에, 필라레토스는 북으로는 말라티아에서 남으로는 안티오키아까지, 서쪽으로는 킬리키아에서 동쪽으로는 에데사까지 미치는 공국을 창립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귀족들을 많이 초청하여 자기 영토에 정착하게 하고 토지와 성을 나눠주었다. 하지만 필라레토스의 공국은 그가 죽은 1090년이 채 되기도 전에 벌써 분열되기 시작했고, 결국은 군소 영주들의 세력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루벤조[]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의 태동[]

필라레토스가 초청한 군주들 중에는 루벤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그라트조 아르메니아의 마지막 왕인 가기크 2세와 연관이 깊은 인물이었다. 루벤은 가기크가 동로마 황제의 초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방문했을 때 왕을 수행했었다. 하지만, 가기크 왕은 평화협상을 하기는 커녕 아르메니아 영토를 포기하고 방랑 생활을 하도록 강요받았고, 나중에는 그리스인들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이 암살이 있은지 얼마 후인 1080년에 루벤은 아르메니아인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조직해 동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고, 여러 아르메니아 군주들과 귀족들이 동참했다. 그리하여 1080년, 루벤은 이후 왕국이 될 독립적인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루벤조라 불리게 되었다. 1095년 루벤이 죽자 그 아들인 아르메니아의 코스탄딘 1세가 바르드즈르베르드와 바흐카 요새를 중심으로 하는 루벤조 공국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킬리키아 내부, 또 외부에 헤툼조와 같은 다른 아르메니아계 공국들이 몇몇 더 있었다. 헤툼조는 이전 동로마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던 오쉰이 창건했으며 킬리키아 관문 남쪽 끝에 위치한 람프론과 바바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루벤조와 헤툼조는 언제나 킬리키아에서의 힘과 영향력을 두고 경쟁을 벌였다. 또한, 다른 여러 아르메니아계 영주들과 필라레토스의 부하 출신 군주들이 마라시(Marash), 그리고 킬리키아 밖으로는 말라티아(멜리테네), 에데사 등지에 건재했다.

1차 십자군[]

코스탄딘 1세의 치세에 1차 십자군 원정이 일어났다. 서유럽 기독교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아나톨리아와 킬리키아로 진군해 들어왔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프랑크 십자군을 강력한 동맹으로 얻게 되는데, 이들의 지휘자인 고드프루아 드 부이용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구원자로 여겨졌다. 코스탄딘은 이 십자군 원정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는데, 킬리키아에 남아있는 동로마의 요새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킬리키아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계획이었다. 킬리키아에서의 직접적인 군사행동과 안티오키아, 에데사, 트리폴리에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지는 등 십자군들의 도움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킬리키아를 동로마인들과 투르크족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또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십자군을 원조했는데, 교황 그레그리우스 13세가 그의 로마 교회사(Ecclesia Romana)에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교회와 기독교 세계에 보여준 선한 행동 중에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 기독교 군주들과 전사들이 성지를 되찾기 위해 나섰을 때, 아르메니아인은 어떤 족속이나 국가도 보여주지 못한 열정과 기쁨, 믿음으로 십자군에게 군마와 식량을 제공하고 인도해 주었다는 것이다. 성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단한 용맹과 충성으로 전사들을 도왔다."

십자군은 그들의 아르메니아 동맹군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코스탄딘을 백작(Comes)과 남작(Baron)의 칭호로 예우해 주었다. 아르메니아인들과 십자군은 서로 빈번하게 통혼하면서 협력 관계를 강화시켰다. 그 예로, 에데사 백작 조슬랭 1세는 코스탄딘의 딸과 혼인했고 고드프루아의 형제 보두앵은 코스탄딘의 조카딸, 즉 그의 형제 도로스(T'oros)의 딸과 혼인했다. 이후 2세기 동안 아르메니아인들과 십자군들은 동맹자이면서도 라이벌인 관계를 유지했다.

비잔티움 제국-셀주크와의 분쟁[]

코스탄딘의 아들인 도로스 1세(T'oros I)는 1100년경에 아버지를 계승했다. 그의 치세 동안 도로스는 동로마, 셀주크를 상대하였고 루벤조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시스(Sis)에 있던 소규모의 동로마 주둔군을 궤멸시킨 후 킬리키아 왕국의 수도를 이전의 타르수스에서 시스로 옮겼다. 1112년 그는 마지막 바그라트조 왕인 가기크 2세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키지스트라 성을 점령했다. 가기크 2세의 암살범들, 즉 성을 다스리던 동로마인 3형제는 그 이유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결국 루벤조 군주들이 힘을 얻음으로써 이 지역에 중앙정부 비슷한 것이 자리잡았다. 12세기 동안 이 체제는 일종의 통치 왕조 같은 것이 되었고,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동로마 제국과 경쟁했다.

도로스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레본 1세는 1129년에 집권했다. 그는 킬리키아의 해안도시들을 통합해 아르메니아인들의 공국으로 만들었고, 이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상권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와 셀주크 투르크 사이에 적대상태가 계속되었고, 또한 안티오키아 공국과도 남부 아마누스산맥 근처에 위치한 요새들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킬리키아를 제국의 영토로 간주하던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 치하의 동로마 제국군이 킬리키아 평원지대에 위치한 대부분의 마을과 도시들을 정복하였다. 제국군은 레본을 사로잡았고, 그의 아들 루벤과 도로스를 포함한 몇몇 가족과 함께 콘스탄디누폴리에 감금했다. 레본은 감금된 채로 3년 후 사망한다. 루벤은 눈을 멀게 한 뒤 감금당한 채로 있다 살해당했지만, 두번째 아들이자 후계자가 된 도로스 2세는 1141년 탈출해, 킬리키아로 돌아와서 동로마에 대한 투쟁을 이끌었다. 초기에 도로스는 제국군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1158년에는 결국 마누일 1세 콤니노스 황제와 이후 얼마 지켜지지 못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굴복했다. 도로스 2세의 치세인 1151년 경, 아르메니아 교회의 총대주교는 총대주교좌를 흐롬클라로 이전했다. 도로스 2세를 이어 루벤 2세(Ruben II), 믈레(Mleh), 루벤 3세(Ruben III)가 각각 1169년, 1170년, 1175년에 공위를 계승했다.

왕국으로 승격된 공국[]

킬리키아 공 레본 2세는 레본 1세의 손자이자 루벤 3세의 형제들 중 한 명으로서, 1187년에 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코냐, 알레포, 다마스코스의 지배자들과 싸웠으며 킬리키아의 영토를 확장해 지중해에 걸친 해안선을 두 배로 늘렸다. 그때, 이집트의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패배시키면서 3차 십자군이 시작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레본 2세는 유럽인들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많은 이득을 얻게 되었다. 1189년 교황 클레멘스 3세는 레본 공과 아르메니아 대주교 그레고리 4세에게 편지를 보내 십자군에 아르메니아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는데, 이 편지는 해당 지역에서의 킬리키아 공국의 성세에 대한 반증이다. 신성 로마 황제들(프리드리히 바바로사와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의 지지 덕에 레본 2세는 그의 공국의 지위를 왕국으로 승격시킬 수 있었다. 1199년, 아르메니아인들이 성탄을 축하하는 1월 6일에, 킬리키아 공 레본 2세는 타르소스 대성당에서, 시리아의 야코부스파 대주교와 타르소스의 그리스 교회 수석대주교 등 수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장군들 앞에서 엄숙한 의식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 킬리키아 총대주교 그리고르 6세 아비랏(Gregory VI Abirad)에게 왕관을 받으면서, 레본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6세의 이름으로 마인츠 대주교 콘라트에게 사자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받았다. 왕위를 얻으면서 그는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의 첫번째 국왕으로서 레본 1세가 되었다. 그는 킬리키아 왕국의 정치, 군사, 경제를 안정시키려 수없이 노력했고 후세에 '장엄왕 레본(Levon the Magnificien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레본의 힘이 강해지자 그는 근처의 십자군국가 안티오키아에게 특히 중요한 동맹이 되었고, 곧 그곳의 귀족들과 통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레본의 왕조정책은 안티오키아를 킬리키아에 복속시키려는 뜻을 내비쳤으며, 안티오키아의 라틴인들은 끝내 이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은 결국 레본의 조카손자인 레몽 루펜과 안티오키아-트리폴리의 보에몽 4세 간에 '안티오키아 계승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1219년, 레몽-루펜이 왕위주장에 실패한 뒤, 레본의 딸인 자벨이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의 새 통치자로 선포되었으며 바그라스의 아담(Adam of Baghras)이 섭정에 들어갔다. 바그라스는 암살당했고, 섭정직은 매우 유력한 아르메니아계 가문인 헤툼조 출신인 '바베론의 코스탄딘'에게 돌아갔다. 코스탄딘은 셀주크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4세에게 동맹을 제의했고, 보에몽의 아들인 필리프와 자벨 여왕을 혼인시킴으로써 이 동맹을 보장하기로 했다. 하지만 필리프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계율을 따를 것을 거부했고 이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너무 '라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124년 시스에서, 필리프는 아르메니아 왕관의 보석을 훔친 혐의로 감금되었고, 몇달 간 감금된 후 독약을 먹고 살해당했다. 자벨 여왕은 셀레우키아에서 수녀처럼 살아가기로 하였으나, 그녀는 이후 1126년에 코스탄딘의 아들인 헤툼과 결혼하도록 강요당했다. 헤툼은 공동 통치자가 되어 국왕 헤툼 1세가 되었다.


헤툼조[]

킬리키아의 유력한 두 가문인 루벤조와 헤툼조가 결혼으로 명백히 합쳐지자, 헤툼조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에서 최고 지배자가 됨으로써 세기에 걸쳐 내려오던 가문, 영토적인 경쟁도 끝이 났다. 1226년 헤툼 1세의 즉위로 단합된 왕조의 왕국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곧 외부로부터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킬리키아의 유력가문인 루벤과 헤툼 두 왕조가 결혼으로 명백히 결합되자, 헤툼조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의 최고 지배세력이 됨으로써 세기에 걸쳐 지속되던 가문, 영토의 경젱관계도 끝이 났다. 1126년 헤툼 1세의 즉위를 시작으로 연합왕조가 지배하는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이 시작되었음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많은 해외세력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보에몽은 아들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셀레우키아 서부 지역을 점령한 (룸)셀주크 술탄 케이쿠바드 1세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헤툼은 또한 동전 한 면에는 자신의 얼굴을, 다른 한 면에는 술탄의 이름을 새기도록 했다.

자벨과 헤툼의 치세에, 징기스 칸과 후계자 오고다이 칸이 이끄는 몽골인들이 빠르게 기세를 넓혀 중앙아시아에서 중동까지 진출, 이집트로 진군하며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점령했다. 1243년 6월 26일 몽골인들은 쾨세다으에서 셀주크 투르크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몽골의 정복활동이 대아르메니아에는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킬리키아는 무사했는데, 헤툼이 미리 몽골인들과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헤툼은 동맹 협상을 하기 위해 1246년 동생 슴바트(Smbat)를 몽골의 카라코룸 궁정으로 보냈다. 슴바트는 1250년, 킬리키아의 주권(integrity)을 보장하고 셀주크가 점령한 요새들을 탈환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합의를 맺고 돌아왔다. 1253년에는 헤툼 자신이 몽골의 새 군주인 몽케 칸을 만나러 카라코름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헤툼은 대단한 예우를 받았고 몽골 영토 내의 아르메니아 교회들과 수도원들에 대한 세금을 면제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몽골로 가는 여정과 킬리키아로 돌아가는 여정 때는 대 아르메니아를 지났는데, 돌아가는 여행 때 헤툼은 더 오래 머물며 지역의 군주, 주교, 수도원장들을 만났다. 헤툼과 그의 군대는 1259년부터 1260년까지 몽골 훌라구 군대의 깃발 아래 종군하며 이슬람화된 시리아에 대한 원정,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함락에 참가했다. 아랍 역사가들에 따르면, 훌라구의 알레포 점령전 동안 헤툼과 그의 군대가 주 모스크와 주변구역, 시장에서 학살과 방화를 벌였다고 한다.

맘루크의 위협[]

그 와중에 이집트에서는 아유브조가 맘루크조로 교체되었다. 원래 맘루크은 징기스칸이 이집트 술단에게 팔았던 투르크계와 기타 노예들로 만든 기병부대였는데, 그들은 1250년과 1253년에 각각 이집트와 팔레스티나를 장악했고 기존의 아유브조와 압바스조가 몽골에 의해 처참히 부서지고 난 후의 공백상태를 메꾸었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왕국도 중요한 교역로가 지나는 카파도키아,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의 국경지대로 진출하며 마라시와 베헤스니 등의 영토를 회복해 나갔는데, 이로 인해 왕국은 맘루크들의 표적이 되었다. 또 아르메니아인들은 향료무역의 주도권을 놓고 맘루크과 경제전을 벌이게 되었다. 맘루크들의 지휘관인 바이바르스는 1266년 중동에서 십자군국들을 퇴출시키기 위해 전역을 개시했는데, 같은 해에 그는 헤툼 1세를 소환해 종주국을 몽골에서 맘루크으로 바꾸고, 몽골과의 동맹으로 얻어낸 영토와 요새들을 맘루크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위협을 받고서 헤툼 왕은 페르시아에 있는 일 칸의 궁정으로 가 군사지원을 얻어내려 했지만, 왕이 없는 동안 맘루크들이 킬리키아를 침략해 오고 말았다. 헤툼의 아들들인 도로스와 레본이 남아 왕국을 지키켰다. 하지만 마리 전투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알 만수르 알리 술탄과 칼라운이라는 사령관이 지휘하는 맘루크 군대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해, 도로스 왕자는 전사하고 레본은 다른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 병사들과 포로로 잡히고 만다. 결국 헤툼 왕은 맘루크에게 여러 요새와 많은 돈을 주고 레본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1268년의 킬리키아 지진이 왕국을 더욱 재난에 빠뜨렸다.

헤툼 왕은 1269년에 아들 레본 2세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는데, 여전히 맘루크들에게 매년 큰 액수의 공물을 바쳐야 했다. 맘루크들은 공물을 받고서도 몇 년마다 계속 킬리키아를 공격해 왔다. 1275년에는 술탄의 에미르들이 어떤 경고도 없이 군대를 이끌고 저항의 의사가 전혀 없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덮쳤다. 타르소스 시가 떨어졌고, 왕국과 성 소피아 성당이 불탔으며, 국고는 약탈당했다. 1만 5천 명의 민간인들이 살해당했고 1만 명이 포로가 되어 이집트로 끌려갔다. 아야스인, 아르메니아인, 프랑크인 인구는 거의 멸족당했다.

맘루크과의 휴전 (1281–1295)[]

1281년 몽케 테무르가 지휘하는 몽골-아르메니아 연합군이 2차 홈스 전투에서 맘루크들에게 패배한 후, 아르메니아인들은 맘루크과 평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1285년에 칼라운이 강력한 공세를 가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은 가혹한 조건으로 10년 기약의 조약을 맺어야 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맘루크에게 수많은 요새들을 내주어야 했으며 방어 요새를 재건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킬리키아 왕국은 강제로 이집트와 교역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맘루크은 교황의 무역봉쇄를 우회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매년 1백만 디르함이나 되는 공물을 바치게 했다. 이런 조약을 맺었음에도, 맘루크들은 계속해서 수없이 킬리키아를 약탈했다. 1292년에는 그 전해에 아크레에 남은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세력을 분쇄한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인 알 아스랍 할릴이 침공해 왔고, 흐롬클라(룸칼레, 칼랏 알 룸)도 약탈당해 총대주교구가 시스로 이전해야 했다. 헤툼 2세는 베헤스니, 마라시, 텔 함둔이 투르크족에게 넘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1293년, 헤툼 2세는 동생인 도로스 3세에게 양위하고 마미스트라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299년, 헤툼 2세는 맘루크의 침입 위협을 맞아 페르시아의 몽골 칸인 가잔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응답해 가잔 칸은 시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왔고, 키프로스의 프랑크족(키프로스 왕,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튜튼기사단 등)의 지원도 요청해 맘루크을 함께 공격하기로 했다. 몽골군은 알레포 시를 장악하고 그곳에서 헤툼 왕의 군세와 합류했는데, 여기에는 아르메니아의 성전, 구호 기사단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 공세 동안에도 함께했다.) 연합군은 1299년 12월 23일 와디 알 하잔다르 전투에서 맘루크을 격퇴해냈다. 하지만 몽골군의 대부분은 그 후 후퇴해야만 했고, 그들이 없는 동안 맘루크은 군세를 제규합해 1300년 5월 그 지역을 탈환했다.

1303년, 몽골인들은 더 큰 군세를 일으키고(대략 8만 명) 아르메니아인들과 연합해 다시 시리아를 정복하려고 시도했지만, 1303년 5월 30일 홈즈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마스쿠스 남쪽 샤캅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격퇴당하고 말았다. 몽골인들이 본격적인 시리아 점령시도는 이것이 마지막으로 생각된다. 1304년 5월 10일 가잔 칸이 죽자, 성지를 탈환하려는 모든 희망도 함께 끝나버렸다.

헤툼 2세는 16살 난 조카 레본 3세에게 양위하고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맘루크 군대가 킬리키아를 침공했을 때 레본 3세가 방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수도원에서 나왔고, 바그라스 근처에서 격퇴시켰다. 그러나 1307년 선왕과 왕이 함께 몽골인들의 킬리키아 대사였던 불라구를 아나자르바 바로 밖에 있는 그의 막사에서 만났을 때 불운이 다가왔다. 막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불라구가 아르메니아 사절단 전체를 살해해버린 것이다. 헤툼의 동생 오쉰이 바로 군대를 이끌고 불라구를 공격해 보복하고 일당들을 분쇄해, 불라구는 킬리키아에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요청에 따라, 불라구는 일 칸국 울제이투 칸에게 처형당했다. 타르수스로 돌아온 오쉰이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의 새 왕으로 즉위했다.

헤툼조는 계속해서 불안정한 킬리키아 왕국의 왕조로 남아있었지만, 1341년 레본 4세가 분노한 군중에게 살해당하면서 끊기고 말았다. 레본 4세는 당시 뤼지냥조가 다스리던 키프로스 왕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맘루크의 공격에 저항하지는 못했다.

킬리키아 왕국의 멸망[]

뤼지냥조의 쇠퇴와 몰락[]

12세기부터 지중해 동쪽 키프로스에 자리잡은 뤼지냥조는 아르메니아인들과 언제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만약 뤼지냥조의 왕국이 키프로스에 있지 않았다면, 아르메니아인들의 킬리키아 왕국 자체가 필요에 의해 키프로스 섬에 세워졌을지도 모른다. 1342년에는 (살해당한) 레본 4세의 사촌인 기 드 뤼지냥이 아르메니아의 왕 콘스탄딘 2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기 드 뤼지냥과 그 동생인 장은 친 라틴파로 간주되었고 레반트에서 로마 공교회가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으로서 뤼지냥조의 왕들은 로마가톨릭과 유럽 문화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아르메니아 귀족층은 이것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였으나,평민들은 변화에 반대했고 결국은 평민들의 불만을 낳았다.아르메니아인들과 봉건영주들이 새로운 뤼지냥조의 지배와 아르메니아 교회의 라틴화를 반대하고 있던 1343년부터 1344년, 킬리키아는 영토확장을 꾀하던 맘루크에게 다시 한번 침략을 받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과 같은 종교를 가진 유럽인들에게 계속해서 도움과 지원을 요청했으며, 왕국은 새로운 십자군 계획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요청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가운데, 1374년 맘루크에게 시스가 떨어졌고 1375년에는 가반 요새가 함락당했다. 가반 요새에서 레본 5세와 딸 마리 공주, 공주의 부군 샤한이 망명을 택했고, 이렇게 왕국은 멸망했다. 마지막 왕 레본 5세는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았고, 파리로 망명해 살면서 무의미한 새 십자군 원정을 제창하다가 1393년 죽었다. 1396년, 레본 5세의 왕위와 권리는 그의 사촌이자 키프로스의 왕인 자크 1세에게 넘어갔다. 이런 이유로 '아르메니아의 왕' 칭호는 키프로스의 왕, 예루살렘의 왕 칭호와 함께 쓰였다. 이 칭호는 현재에는 사보이 왕가가 가지고 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인구의 분산[]

맘루크가 킬리키아를 점령하긴 했으나, 계속 지켜내지는 못했다. 투르크계 부족들이 정착했는데 이것은 티무르의 킬리키아를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로 3만 명이나 되는 부유한 아르메니아인들이 킬리키아를 떠나, 1489년까지 뤼지냥조가 다스리던 키프로스에 정착했다. 여러 상인 가문들도 서쪽으로 도피해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에스파냐에서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합류하거나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했다. 가난한 아르메니아인들만이 킬리키아에 남았다. 어찌 됐던 그들은 투르크족의 지배 아래에서 살림을 꾸려 나갔다.

16세기에, 킬리키아는 오스만의 지배 아래 떨어져 17세기에는 공식적으로 '아다나 빌라옛'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킬리키아에서는 그 세월 동안 아르메니아 문자가 보존되었기 때문에 오스만 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가중 중요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1909년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다나 학살의 피해를 당했다. 현재 살아남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인들의 후손들은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로 분산되었으며, 킬리키아 총주교좌는 레바논의 안텔리아스에 있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의 문장인 사자는 이 시기까지 아르메니아 국가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아르메니아 군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의 사회[]

문화[]

인구통계적으로 보면,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는 지배층을 형성한 아르메니아계와 그리스인들, 유대인들, 무슬림, 그리고 여러 유럽인들로 이루어진 다인종사회였다. 다문화적인 인구는 유럽, 그중 특히 프랑스와의 경제적, 정치적 연결과 함께 아르메니아 문화에 새로운 영향을 끼쳤다. 킬리키아의 귀족들은 기사도, 패션, 프랑스식 기독교 이름을 사용하는 등 여러 서유럽적인 삶의 방식을 받아들였다. 킬리키아 사회는 전통적인 아르메니아의 나카라르 체계보다는 서방의 봉건제에 더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사실, 킬리키아 시대에는 남작이나 컨스터블 같은 서방의 작위가 전통 아르메니아식 나카라르나 스파라펫 같은 칭호를 대체했다. 기사에 대한 유럽식 전통 역시 도입되어, 유럽과 유사한 마상시합과 토너 먼트가 킬리키아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서유럽의 영향은 매우 커서 아르메니아 문자에 새 문자 2개가 도입되고 아르메니아어에 여러 라틴계 단어들이 도입될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서유럽의 영향이 반감을 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우선, 대부분의 평범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로마 공교회나 그리스식 정교회로의 개종에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문화적인 영향은 일방적이지많은 않아서,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인들 역시 서방으로 돌아가는 십자군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것이 아르메니아의 전통 건축이었다. 유럽인들은 십자군 국가에서 일하던 아르메니아인 석공들에게 아르메니아식 교회건축의 요소 일부와 함께 축성술의 요소를 도입했다. 대부분의 아르메니 아식 성들은 크락 드 슈발리에나 마르캅의 구호 기사단 성들처럼 비범하게 높은 바위산을 이용하고 굽은 벽과 둥근 탑을 갖추고 있었다. 킬리키아 시대에는 아르메니아 예술에서 중요한 작품들이 나오기는 했는데, 주목할 만한 것으로 13세기 흐롬클라에서 작업한 토로스 로슬린의 채색 문서들이 있다.

경제[]

세월이 지나면서,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은 지중에 동쪽 해안에 위치한다는 전략적 이점 덕에 부유한 나라로 성장하였다. 왕국은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만을 지중해로 이어주는 무역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왕국은 향료무역에 있어 특히 중요했으며 가축, 모피, 양털, 면화 등의 무역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목재, 곡물, 술, 건포도, 생사 등 다른 중요한 교역품도 수출했다. 레본 왕의 치세 동안, 킬리키아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고 서유럽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다. 왕은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프랑스, 카탈루냐인들과 조약을 맺고 상업의 대가로 면세 등의 혜택을 주었다. 아야스, 타르소스, 아다나와 마미스트라에 고유한 교회, 법정, 무역소를 가진 중요한 유럽 상인 공동체가 생기게 되었다. 귀족들의 제2언어가 프랑스어였듯, 킬리키아 상인들의 제2언어는 이탈리아였는데 앞서 언급한 세 이탈리아 도시들이 킬리키아 경제에 막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국의 주요 항구도시인 아야스는 레본 1세의 치세와 그 이후에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되살아났다. 이 항구도시는 항구이자 무역중심지로, 아시아에서 수입한 향료, 비단, 면직물, 카페트와 진주가 서방에서 온 의복과 금속제품이 교역되었다. 그 일례로, 마르코 폴로는 중국으로 여행을 떠날 때 1271년 아야스에서 출발했다. 13세기에 도로스 왕의 치세에, 킬리키아 왕국은 이미 고유의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다. 각각 드람과 타그보린이라 하는 금화와 은화였는데, 시스와 타르소스에서 제조되었다. 상인들은 이탈리아의 두카토나 플로리노, 체키노, 그리스의 베잔트 금화, 아랍의 디르함, 프랑스의 리브르 같은 외국 통화도 모두 받아주었다.

종교[]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총대주교좌는 동로마와 셀주크인들의 전쟁터가 된 아르메니아 고원을 떠나 망명해 다니던 아르메니아 동포들을 따라다녔다. 1058년, 상당한 수의 아르메니아 인구가 거주하던 카파도키아의 시바스로 이전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에는 1062년 타블로르, 1066년 자멘다프, 1116년에는 조브크, 1149년에는 흐롬클라 등 킬리키아의 여러 지역을 옮겨다녔다. 왕 레본 1세의 치세에 총대주교는 먼 흐롬클라에 있었다. 총대주교는 왕국 내 아르메니아 교회들을 관리하는 데에 14명의 주교들의 보조를 받았는데, 교회의 수는 이후에 늘어났다. 대주교좌는 타르소스, 시스, 아나자르바, 람브론, 마미스트라에 있었다. 또 대부분의 위치가 여전히 확실하지 않긴 하지만 60개가 넘는 수도원이 있었다.

1198년, 시스의 총대주교인 그리고르 6세 아피랏은 아르메니아 교회와 로마 공교회의 연합을 선포했다. 하지만, 지역의 성직자들과 백성들이 이 연합에 강경하게 반대했으므로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서방 교회는 화해를 위해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로 수없이 많은 사절을 보냈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프란치스코회가 이 활동의 책임을 맡았고 1288년에는 몬테코르비노의 죠반니 본인이 왕국에 도착했다.

헤툼 2세는 양위한 뒤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가 된 적이 있다. 아르메니아인 역사가인 네르세스 발리엔츠는 프란치스코회 소속에 라틴교회 연합론 지지자였다. 교황의 상위권 주장은 양 교회의 통합에 긍정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1261년 아크레 공의회에 파견된 아르메니아 대표 므키타르 스크라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실망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다.

"로마 교회는 무슨 권한으로, 자신들은 다른 사도 교회에 대해 판단받지 않으면서 다른 사도교회들을 판단하려 하는가? 우리 (아르메니아인들)은 당신들(로마 가톨릭 교회)을 심판할 자격이 있고, 당신들은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음을 부인할 권리가 없다."

1293년 맘루크가 흐롬클라를 약탈하면서, 총대주교좌는 킬리키아왕국의 수도인 시스로 이전된다. 왕국이 멸망하고 한참 후인 1441년에 시스의 아르메니아교회 총주교인 그리고르 9세 무사베키안츠는 피렌체 공의회에서 아르메니아 교회와 라틴 교회의 통합을 선포했다. 키라코스 1세 비라펫시가 이끄는 아르메니아교회 분리주의파는 이 선언에 반대하고 총주교좌를 에치메아진으로 이전해 시스의 총주교좌를 고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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