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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치히 자유시(~自由市, 독일어: Freie Stadt Danzig, 영어: Free City of Danzig) 또는 그단스크 자유시(폴란드어: Wolne Miasto Gdańsk)는 발트 해 연안에 위치하였으며, 나폴레옹 시대와 양차 세계대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존재한 도시국가이다. 흔히 단치히 자유시라고 하면 1920년 1월 10일에 두 번째로 설립된 것을 일컫는다.[출처 필요]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독일군이 자유시를 점령함과 함께 사라졌다.


역사[]

나폴레옹 시대의 단치히 자유시[]

1793년폴란드 분할 이후애 단치히(현재의 그단스크) 지역은 프로이센령이 되었으며 서프로이센 지역의 주도가 되면서 자연스레 서프로이센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07년 9월 9일에 반(半)독립의 주를 설치하였는데, 1813년 1월 22일 폐지되었다. 이 지역은 1815년 빈 조약으로 다시 프로이센 왕국으로 넘어갔다.

성립[]

1919년 연합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 제국과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서 이 도시는 국제 연맹에 의해 세워진 중립도시인 단치히 자유시가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르면, 새로 성립되는 자유시는 거주지에 근거한 자체적 "단치히 자유시 국적"을 가지게 된다. 독자적인 화폐도 있었고 독자적인 국기도 가지고 있었다. 1924년부터 냉동고, 식용유 제조공장, 철도, 조선소 등이 건설되어 발트 해 유수(有數)의 항구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33년 단치히 의회는 독일 나치 당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유대인에 대한 탄압 정책이 가해졌다.

멸망[]

히틀러는 단치히 반환을 구실로 폴란드 침공을 감행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일어나자마자 단치히 의회는 나치 독일에 합병을 선언하였다. 단치히 자유시에 있던 폴란드 민간인들은 우체국 등지에서 항전을 끝까지 벌이다가 결국 총살당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단치히는 독일이 장악하였다. 독일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자 자유시는 소멸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 말기 소련군과의 뒤이은 전투 끝에 1945년 들어 시가지와 항만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 소련군은 이 도시를 점령하였고, 종전 후 단치히는 폴란드령으로 귀속되어 종래의 독일인 주민은 모두 추방되어 현재에 이른다. 파괴된 시가지, 항만시설, 공장 등은 전후 복구되었다. 최근에는 무역항이라기 보다는 바다와 인접하지 못한 중앙 유럽 국가들의 수출입문호 역할을 하고있다.[출처 필요]


영토[]

단치히 자유시는 단치히 시, 조포트(Zoppot)·올리바(Oliva)·티겐호프(Tiegenhof)·노이타이히(Neuteich) 등의 읍(邑)과 252개 마을, 63개 소(小)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면적은 1,966평방km였다.

인구와 주민[]

자유시의 인구는 1919년에 35만 7천에서 10년 사이에 40만 8천으로 증가했다. 공식적 인구조사에 따르면, 주민의 95%가 독일인이었다.[1] 그리고 나머지는 카슈브인폴란드인이었다. 그런데 E. Cieślak에 따르면, 1929년의 폴란드인 인구는 도시민의 9.5%에 해당하는 3만 5천 명이었다고 한다.[2][정확한 구절 인용 필요] 한편 Henryk Stępniak는 1929년에 추정한 폴란드인의 인구는 2만 2천 명(6%)이며, 1930년대에는 폴란드인의 비중이 13%로 늘어났다고 보았다.[3]

종교면에서는 1924년에 주민의 54.7%가 프로테스탄트(220,731명. 대부분 고(古)프로이센 합동교회에 속하는 루터파)였으며, 34.5%는 가톨릭(140,797명), 2.4%는 유대교(9,239명) 등이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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